전통 공예

옻칠, 시간을 입힌 공예 — 느림의 미학이 만들어낸 감성 디자인

info-ytt 2025. 4. 19. 21:44

옻칠 공예는 단순한 기술 이상의 무언가를 담고 있다. 옻나무에서 채취한 천연 수액을 나무, 금속, 도자기 등의 표면에 수차례 덧칠하는 이 공예는, 인간과 자연이 오랜 시간 교감해온 전통적 작업 방식이다. 한국에서는 삼국시대부터 옻칠이 쓰인 유물이 발견되고 있으며, 조선시대에는 가구, 그릇, 사찰의 장식물 등 다양한 용도로 활발히 사용되었다.

하지만 옻칠 공예의 진정한 가치는 오랜 시간을 견뎌온 ‘내구성’과 ‘심미성’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이 공예에는 ‘느림’이라는 시대 역행적 미덕이 깃들어 있다. 하루에 한 번, 많아야 두 번의 칠을 하며, 각 공정마다 자연의 리듬을 따르는 작업은 현대인의 삶 속에서 잊혀진 리듬을 다시 상기시킨다. 그래서 옻칠 공예는 지금, 오히려 더욱 새롭게 다가온다.

옻칠, 시간을 입힌 공예 — 느림의 미학이 만들어낸 감성 디자인


전통 기술의 품격, 그리고 일상의 확장

과거 옻칠은 왕실의 가구나 불교 유물처럼 고급스러운 용도에만 쓰이던 공예였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전통 기법은 유지하되, 그 쓰임은 보다 대중적이고 감성적인 방향으로 넓어지고 있다. 공예 장인들은 오래된 기술을 바탕으로 컵 받침, 트레이, 조명 프레임, 인테리어 소품 등 현대 공간에 어울리는 다양한 제품들을 만들고 있다.

특히 옻칠은 천연 수액을 이용한다는 점에서 친환경적이다. 별도의 화학 성분 없이도 방수와 방충 기능이 우수하며, 표면 질감이 자연스럽고 고급스럽다. 최근에는 ‘제로 웨이스트’나 ‘슬로우 라이프’를 추구하는 소비자들이 많아지면서, 옻칠 공예가 재조명받고 있다. 이런 흐름은 단순한 트렌드를 넘어 ‘가치 소비’를 중시하는 문화로까지 이어지고 있다.


한 번의 칠, 그리고 기다림의 기술

옻칠 공예의 제작 과정은 결코 단순하지 않다. 표면 다듬기 → 생옻 정제 → 얇은 칠 → 자연 건조 → 광내기의 순서로 이어지는 이 작업은 공정 하나하나가 정성과 인내를 요구한다. 옻칠 장인들은 하루 종일 작업장에서 머무르면서도, 실제 칠하는 시간은 30분을 넘기지 않는 경우도 많다. 나머지 시간은 ‘기다림’에 할애된다.

중요한 건 ‘얇고 균일하게 칠하는 것’이다. 생옻은 점도가 높고 다루기 까다로워 균일한 도포가 어렵다. 손목의 힘, 붓의 각도, 칠의 양 등을 완벽히 조절해야 하며, 이는 오랜 숙련 없이는 불가능하다. 게다가 옻은 사람에 따라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킬 수 있어, 장인들은 오랜 시간 자신만의 작업 방식과 체내 내성을 함께 길러야 한다.

건조 역시 까다롭다. 옻칠은 높은 습도에서 더 잘 마르기 때문에 여름철에는 수월하지만, 겨울철에는 실내 습도와 온도를 인위적으로 조절해야 한다. 그래서 옻칠 공방에는 제습기나 가습기, 온풍기와 같은 장비가 필수로 갖춰져 있다. 이 모든 과정을 거쳐야만 매끄럽고 은은한 광택을 가진 작품이 탄생한다.


광택 속에 숨겨진 감성

광내기는 옻칠 공예의 꽃이라 불린다. 모든 칠이 끝난 후, 연마천이나 천연 연마재를 이용해 수차례 표면을 닦아내며 윤기를 낸다. 이 과정을 통해 작품은 마치 살아 있는 듯한 광채를 띠게 되며, 보는 이로 하여금 깊은 인상을 남긴다. 특히 시간이 흐를수록 옻칠은 점점 더 깊은 색감과 질감을 띠게 되며, 이는 공장 제품에서는 구현할 수 없는 매력이다.

많은 옻칠 장인들은 완성된 제품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과정과 감정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 장인의 손길은 단순한 기술을 넘어, 고요하고 치열한 내면의 시간을 작품에 담아낸다. 그래서 옻칠 공예는 단순한 물건이 아닌 ‘감성 오브제’로서의 가치를 지닌다.


전통과 현대, 공존을 위한 실험

최근에는 젊은 공예가와 디자이너들이 옻칠 공예를 현대적으로 해석하는 다양한 시도를 이어가고 있다. 패션 아이템, 모바일 액세서리, 디지털 기기 거치대 등 옻칠과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분야에도 과감히 적용하고 있다. 이는 전통 공예가 단순히 과거에 머무르지 않고, 미래지향적인 확장성을 가질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또한, 공예 체험 프로그램, 원데이 클래스, 지역 공방 연계 워크숍 등을 통해 일반인들도 옻칠 공예를 직접 체험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아지고 있다. 특히 어린이들과 함께하는 프로그램은 전통 공예의 저변 확대뿐 아니라, 미래 세대에게 자연 친화적 가치를 전달하는 역할도 하고 있다.


옻칠이 주는 느린 울림

우리는 너무 빠르게 지나가는 시대를 살고 있다. 클릭 한 번이면 정보가 쏟아지고, 하루에도 수십 개의 물건이 만들어지고 소비된다. 그런 시대 속에서 옻칠 공예는 속도를 낮추는 예술이다. 하루에 한 번, 정해진 리듬 속에서만 칠할 수 있고, 그 칠이 마르기를 조용히 기다려야만 다음으로 나아갈 수 있는 공예.

옻칠은 단지 오래가는 재료가 아니라, 오랜 시간을 함께 살아가는 철학이다. 소비되는 물건이 아닌, 오래 함께할 수 있는 존재. 삶의 속도를 천천히 되돌아보고 싶은 이들에게, 옻칠 공예는 그런 시간을 선물해줄 수 있다.

공예가 유행을 타지 않는 이유는 그 안에 ‘사람의 시간’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전통이 현대와 조화를 이루며 실용성과 감성을 모두 갖춘 예술로 진화하는 지금, 옻칠은 가장 고요하고 깊이 있는 방식으로 우리 곁을 비추고 있다.